소설 <무진기행>, 김승옥 - 안개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붐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김승옥, <무진기행>


by 하치 | 2008/04/17 00:07 | 소설, 시, 만화책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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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담요 at 2008/04/17 00:10
요즘 좋다는 작가들이 참 많이 나오지만, 김승옥씨 만큼 글을 쓰는 작가는 드문 것 같아요. 제가 듣기로는 문창과,국문과 학생들 중에서 소설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라면, 오정희와 김승옥의 소설들은 바이블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묘사나, 전반적인 진행이 매끄럽겠다는 거겠죠. 아무튼 김승옥씨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에요. ^_^
Commented by oIHLo at 2008/04/17 10:38
김승옥씨를 뺏어가서 기독교에 맺힌 감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
Commented by 하치 at 2008/04/17 10:54
저도 비교적 현대작가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오랜만에 김승옥씨의 문장을 보고 눈이 확 뜨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편향된 시각으로 문학을 접해왔던 것이 조금 반성이 될 정도로요.
Commented by 마리아 at 2008/04/17 22:59
이게 무진기행 첫부분이었던가요? 헤헹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전 한동안 외국 소설에만 푹 빠져있다가 간만에 무진기행을 읽고
갑자기 한국소설의 매력에 퐁당 빠졌었지요.
어쩐지 필사해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문장들이에요.
Commented by 하치 at 2008/04/17 22:59
필사! 맞아요, 필사. 아까 그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그만.
필사의 충동이 느껴지는 문장이에요, 저에게도.
Commented by 한나 at 2008/04/18 09:42
아는 분이 "00는 무진이 진짜 전라도 어디짝에 있는 덴 줄 알더라니까. 무식하긴! 저열하긴!" 하고 목청을 높이신 적이 있어요. (네. 뒷담화 중이었습니다. -_-;)

...저도 무진이 전라도 어디짝엔가 있는 덴줄 알고 있었는데... 라고는 정말 말할 수가 없었어요. 흙.
Commented by 하치 at 2008/04/18 10:32
저는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문학시간에, 선생님이 설명해 주셨어요. 가상의 공간이라고. 아마 그렇게 배우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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