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회하지 않아 (No Regrer, 2006) ★★★☆
감독 : 이송희일
출연 : 이한 (재민)
이영훈 (수민)
조현철 (정태)
김동욱 (가람)
(줄거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1. 간만의 '퀴어 멜로' 영화. 아니 여자와 남자의 연애사를 그리듯, 태연하게 남자와 남자 사이의 연애사를 그려낸 영화가 또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로드무비>도, <여고괴담 두번째이야기>도, <왕의 남자>도 동성애가 소재로 등장했고 모두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들이지만 다들 어딘가 독특했고 조금은 무거웠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는 놀라울 정도로 통속적이다. 백지 상태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파격적인 소재!' 하고 놀랐나본데, 사실 꽤 많은 수의 여성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아>의 설정은 너무 식상해서 이제는 쓰지 않는 연예인 팬픽션 소재 중 하나라는 것을.
2.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꿈을 키우는 고아원 출신 노동자. 그리고 재벌 2세쯤 되는 매력적인 한 남자가 이 노동자를 먼저 좋아해서 쫓아 다닌다. 노동자는 이래저래 일하던 곳에서 짤리고 게이를 상대하는 호스트가 된다. 둘은 결국 서로 좋아하게 되지만 재벌 2세에겐 약혼녀가 있다. '아 정말이지 이 얘기는 이제 글로 써먹지도 않는 거잖아?'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여인들도 있겠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오히려 이 영화가 싫지 않았다. 아무리 식상하고 흔해빠진 팬픽 소재라도 그걸 영화로 그럴싸하게 찍어낸 예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선했다. 그런 팬픽은 한 트럭 나왔을지 몰라도 이런 영화는 이제 처음이지 않은가. 조금 관대해도 되지 않을까.
3.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차 안에서의 묘한 공기는 제대로였고, 용기를 낸 재민의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게이 호스트바 마담 아저씨의 감칠맛 나는 연기도 즐거웠다. 최근 커피프린스 진하림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가람 역의 김동욱도 귀여웠고. 재민 역이 좀 답답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4. 다만 오해와 납치와 살해 위협으로까지 이어지는 뒷부분은 글쎄, 잘 모르겠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까지는 이해가 됐지만, 산이라는 장소에 갑자기 영화의 톤이 바뀌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나치게 그 부분이 길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끔찍한 결말일까 생각했는데, 적당히 해피엔딩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니 영화가 그 산에서 벗어난 게 다행이라 여겨졌던 걸지도)
5. 어쨌든 나는 이송희일 감독의 다음 영화를 기대한다. 요새 모 영화 관련해서 안좋은 일을 좀 당하셨는데, 사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송희일'이라는 이름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냥 잊혀졌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이 영화의 존재를 상기시킬 수 있었다. 잘 된 일이라고 까진 할 수 없겠지만, 이번 일들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계기가 되고, 또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