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은 안녕했다. 나만 제외한다면 언제나 안녕한 도시였으므로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 한 귀퉁이에 숨겨진 내 작은 방도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거기 있었다. 전화기는 던져두고 간대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액정화면에 ‘부재중 전화 12통’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회사, 김영수, 김영수, 김영수, 회사, 김영수, 김영수... 콧구멍이 벌름거려지는 결과였다.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 벽지가 누렇게 바래 가고 있었다. 무단결근 이틀째. 처리해야 할 일들이 첩첩이 쌓여 있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나, 어쩌지? 마음에 대고 가만가만 묻는다. 마음이 반문한다. 넌, 지겹지도 않니?
왜 아니겠는가. 지겹다. 지겨워서 까무러칠 것만 같다. 새로 산 하이힐을 절뚝이며 첫 직장에 출근한 이래, 한 달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일요일 밤에는 과음을 삼갔고, 월요일 아침에는 지구의 자전이 멈추기를 바랐으며, 월요일 오후에는 아침에 바라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바빴다. 아침 아홉시와 밤 아홉시 사이에는 대변도 마렵지 않았다. 몸의 사이클조차 컨베이어 벨트의 나사처럼 팽팽히 조여져 살아왔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내 어릴 때의 꿈도 이렇게 지지한 사무원으로 늙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꿈이 있었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꿈. 간절히 이루고 싶은 미래, 헤엄쳐 닿고 싶은 기슭. 사람들은 모두 다 한가지씩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듯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태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은 유희. 우거지 왕국을 세우겠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안 이사도 있다. 꿈은 인간을 생에 가뿐히 헌신하도록 만드는 기적의 동력처럼 보인다. 단 한 사람, 나의 경우를 빼면 말이다. 도무지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내 청춘은 끝나가고 있었다. 아니, 애 저녁에 벌써 종 쳐버린 건가?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조선일보에서 연재했던 소설이다. 딴 얘기지만, 그러고보면 조선일보는 의외의 작품들을 연재소설로 내 놓는 것 같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도 그렇고 지금 연재중인 김영하의 <퀴즈쇼>도 그러하다. 일러스트도 권신아의 예쁜 그림이었다. 이번 퀴즈쇼의 일러스트는 이우일. 조선일보가 구축하고 있는 이미지에 비하면 참으로 상큼하기 이를 데 없다.
연재했던 당시나, 소설로 나온 뒤 한참동안에도 이 소설은 그저 제목으로만 기억되던 소설이었다. 말랑말랑할 것 같은 느낌만 진하게 전해져 왔다. '난 가벼운 소설은 싫어' 라는 생각이 꽤 오랫동안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었나보다. 그러다보니 이 소설 역시 이래저래 미뤄져 온 것 같다. 그나저나 가벼운 소설이라니, 참으로 오만하다. 가벼운 건 뭐고, 무거운 건 뭐란 말인가. 그렇게 따지면 내가 그렇게 좋아해 마지 않는 김영하의 소설도 결코 무겁지 않다. 하루키는 무거운가? 가네시로 카즈키는? 생각하기에 따라 날아갈 듯 가벼울 수 있는 소설들이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도 가볍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지만, 달콤하다. 김영하의 소설이 중독성 강한 담배연기같은 소설이라면 정이현의 이 소설은 빨간 체리주스 내지는 레모네이드 정도 되지 않을까.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다.
평범한 축에 드는 31세 직장인 여성을, 아주 디테일하면서도 가려운곳을 꼭꼭 집어 제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바탕이다. 그녀의 하루 일과와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그리고 회사라는 것. 이미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꿈이라는 것. 미래에 대한 생각. 결혼에 대한 생각. 친구의 결혼식. 자신을 스쳐간 몇명의 남자들. 매달 찾아오는 생리통까지 기타등등, 보여줄 수 있는 건 모두 뒤집어서 보여준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주인공 오은수는 지금도 서울 어딘가에서 생활하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다지 미화시키지도 않았고, 폄하시키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가 소설 속 인물이기 때문에 입은 은혜라 함은 그녀 주변에 있는 세명의 남자들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 외에는 단점이 없는, 스위트한 연하의 남자친구(하는 짓이 진짜 어쩜 그렇게 귀여운지). 평범하지만 여유롭고 편안하며 어른스러운 30대 중반의 맞선남(매너가 최고). 그리고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표시해 온 마음이 맞는 오랜 친구. 거의 판타지라고 할수 있을 만큼 이 남자들은 최고의 매너와 배려를 보여준다. 정신이 어지러울 만큼 예쁜짓을 돌아가면서 해댄다. 읽으면서 몇 번씩이나 허공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아 진짜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딨어! 없어!'
그래도 이 소설은 마냥 판타지는 아니다. 7살 연하의 남자친구가 아무리 스위트해도 한계는 한계라고 정확히 선을 그어 명시해서 보여줄 때, 이는 서로에게 꽤나 잔인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소설의 중반이 지나 뒷부분을 향할땐 '이거 스릴러 아냐'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어쨌든 간만에 읽은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처음엔 막대사탕을 먹는 것 같았는데, 점점 다크초콜렛의 쌉싸름함이 느껴지더라. 읽는 이의 포커스에 따라 그저 그런 연애소설로도 읽힐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주인공 오은수가 여자이고 하다 보니 여러가지 주변상황들이 남 얘기같이 느껴지지 않아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아마도 수많은 여성 독자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